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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598-1142(Print)
ISSN : 2383-9066(Online)
Journal of architectural history Vol.23 No.5 pp.37-45
DOI : https://doi.org/10.7738/JAH.2014.23.5.037

Study on the character of architecture remains in Gwangmyeong-dong site, Geongju

kwang-su kim
Corresponding Author : su0210@hanmail.net
June 13, 2014 August 20, 2014 October 30, 2014

Abstract

It was identified by the excavation that architecture remains were confirmed buddhist temple consist of ruins of main building of a temple, auditorium site, ruins of stone pagoda, embankment, pedestrian Facilities and drainage etc. in the Gwangmyeong-dong site. The site has been held temple arrangement with 1 main building of a temple, twin Pagodas from the Unified Silla period to Goryeo dynasty. The temple constructed after that was destroyed the architecture in the Unified Silla period. It seems that aristocrat or royalty power of within group of the nearby remains of city which was constructed in the Unified Silla period build and visit the temple. Considering there are excavations, it assumes that the temple had been constructed during the last days of the Unified Silla, was closed up during the mid-Goryeo Dynasty.


경주 광명동유적 건물지의 성격에 대하여

김 광수
(울산문화재연구원 연구원)

초록


    1.서 론

    1-1.연구 배경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서는 寺址(寺刹) 및 廢寺址에 대한 조사가 급증1)하고 있다. 그 중에서 자타가 공인하 는 불교문화유산의 寶庫인 신라의 千年古都경주에는 수많은 사지 및 폐사지가 존재하고 있다. 경주지역에 분 포하는 사찰(사지) 중에는 『三國遺事』나 『三國史 記』등의 문헌기록으로 寺名과 그 위치를 알 수 있는 곳도 있으나, 아직 많은 수의 사지 및 폐사지들이 그 명 칭과 위치비정에 있어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2). 또 한 조선시대 지리지인 『東國輿地勝覽』이나 『新增東 國輿地勝覽』을 비롯하여 경주지역의 향토지인 『東京 雜記』, 『東京通誌』등에서도 경주지역의 사찰에 대해 일부 소개하고는 있지만, 대략적인 위치와 사명만 나와 있을 뿐 내용은 매우 제한적이라 각 사지에 대한 구체적 인 내용을 알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또한 수많은 폐사지가 무분별한 개발과 경작 등으로 인해 역사적․학술적 가치의 규명 없이 훼손․멸실되는 등 보호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고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어서 경주지역 전체에 분포된 사지와 관련된 유 적․유물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조사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가운데 최근 경주 광명동유적에서 통일신라시 대∼고려시대 건물지가 조사3)되었다. 발굴조사된 건물지 는 경주지역 폐사지 중 하나일 가능성4)이 농후하여 성격 규명과 연대의 검증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본고에서 다루게 되었다.

    1-2.연구 목적

    이러한 연구배경을 바탕으로 먼저 경주지역에 분포하 는 폐사지의 조사 연혁을 알아보고, 광명동유적에서 발 굴 조사된 건물지의 현황을 살펴보겠다. 그런 후에 건물 지의 배치상태와 출토유물 등을 통한 성격규명을 하고, 또한 인근지역에서 발굴조사된 坊里5) 내에 분포한 동시 기 건물지와의 연계성을 검토하겠다. 그리고 출토유물의 분석을 통해 건물지의 초축 시기와 존속 기간을 규명하 는 것이 연구의 목적이다.1

    2.慶州地域廢寺址調査沿革6)

    경주지역 폐사지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연구는 일제 강점기 日人學者들에 의해 처음 이루어졌고, 해방 이후 에는 우리나라의 조사․연구기관 및 대학박물관 등에서 학문적 의미로서의 조사․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먼저 일제강점기 때에는 유적의 현황파악 중심으로 조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고, 1910년대 이후부터는 사 지 발굴조사를 비롯하여 유적 측량, 유물 실측, 석탑 복 원, 그리고 사지의 복원안 제시7) 등 조사․연구의 범위 가 점차 확대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당시 조사 를 통하여 새롭게 알려진 유적들은 각종 사료에 기록된 내용을 근거로 사명이 비정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광복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는 感恩寺址의 발굴조사를 시작8)으로 佛國寺, 高仙寺址, 芬皇寺, 皇龍 寺址등 신라시대 주요 사찰(사지)을 중심으로 단일유적 에 대한 시․발굴조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와 동시 에 경주지역의 불교유적에 대한 지표조사가 실시되어 많 은 유적들이 새로이 보고되었다.

    1980년대 이후로는 1970년대부터 이어온 대규모 사 찰유적들의 발굴조사가 완료․정비되었고, 또한 중․소 규모의 사찰유적에 대한 시․발굴조사와 정비 사업이 함 께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경주지 역 내에 분포하는 폐사지에 대한 지표조사가 더욱 활발 히 이루어졌고, 이들을 바탕으로 경주지역 신라사찰의 입지, 현황, 분포 등에 대한 개인 연구논문9)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2000년 이후 경주지역의 불교유적 혹은 사지에 대한 학술발굴조사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국립경주박물관 등에 의해 활발히 이루어졌다. 天官寺址, (傳)仁容寺址, 興輪寺址, 四天王寺址등이 발굴조사되었고, 1980∼90년 대에 이어 신라 사찰의 현황에 관한 개인적 연구논문10) 이 많이 발표되었다.

    3.考古學的檢討

    광명동유적은 경주시 광명동 산81-1번지 일원에 위 치한다. 유적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구미산(해 발 594m) 양 갈래 구릉의 말단부에 해당한다. 건물지는 동쪽과 서쪽에 각각 위치한 구릉 말단부 사이의 계곡부 에 축조되었다. 자연곡부에 암갈색 점사질토가 자연 퇴 적된 후 선축된 건물지가 먼저 축조되었다. 선축된 건물 지가 폐기된 후에 整地를 하여 기반을 조성한 후 건물지 가 축조되었다. 조사 당시 건물지의 정면인 남쪽은 계곡 부에 계단식 논이 조성되어 있고, 건물지는 수목 및 수 풀로 이루어져있었다2

    건물지의 전체적인 방향은 북동-남서방향으로 등고선 과 직교하여 위치한다. 건물지의 배치는 중앙부의 금당 지를 중심으로 강당지, 축대, 석탑지, 보도시설, 배수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금당지의 서쪽 일부와 석탑지(서 탑) 및 축대의 서쪽 일부는 이후에 축조된 조선시대 건 물지의 구들시설에 의해 파괴되었다.

    3-1.金堂址

    전체 건물지의 배치형태와 금동불입상, 귀면와 등의 출토유물로 볼 때 금당지로 추정된다. 금당지는 발굴 조 사된 전체 건물지의 중앙에 위치한다. 현재 기단 석렬과 적심 및 초석 등이 남아있다. 금당지는 선축된 통일신라 시대 건물지가 폐기된 후 흙과 기와편 등으로 약 80∼ 100㎝ 가량 정지를 하여 축조되었다. 장축방향은 북동- 남서방향이고, 평면 형태는 ‘一字形’으로 세장방형이다.3

    금당지의 칸 수는 잔존한 초석과 적심, 회랑으로 추정되 는 기단 석렬의 폭으로 볼 때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추정되고, 규모는 잔존길이 약 1,300㎝, 폭 약 380㎝이 다.4

    광명동유적의 금당지는 경주지역에서 확인된 통일신 라시대 및 고려시대 사찰의 금당지 규모와는 확연히 차 이가 난다. 기존 발굴 조사된 금당지를 보면 전)인용사 지11)는 정면 5칸×측면 5칸, 황룡사 서편사지12)는 정면 3 칸×측면 4칸, 보문사지13)는 정면 7칸×측면 5칸이다. 경 주지역 사찰의 금당지는 대부분 구릉지역이 아닌 개활지 인 평지에 조성되었다. 이처럼 광명동유적 금당지와의 차이는 기능적인 차이라기보다는 계곡부에 위치한 지형 적인 제약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14). 초석은 3개만 잔 존하는데, 60∼80㎝의 대형할석으로 적심의 중앙 상부에 놓여졌다. 적심은 5군데가 잔존하는데 평면 형태는 원형 이고, 규모는 60∼70㎝×80∼90㎝, 적심 간 거리는 240㎝ ∼250㎝이다. 기단 석렬은 길이 60∼80㎝ 내외의 가공된 석재를 들여쌓기를 하였고, 조사 때는 2단만 잔존하였다. 내부에서는 기와편, 귀면와, 암․수막새, 전돌, 금동불 입상, 자기편 등이 출토되었다.5

    3-2.講堂址

    추정 금당지의 북쪽 중앙부에 위치하는 것으로 볼 때 강당지로 추정된다. 현재는 일부 결실되었지만 기단석렬 1단만이 잔존해 있고, 강당지의 북쪽으로는 배수구가 弧 狀으로 설치되어 있다. 평면 형태는 세장방형이고, 규모 는 길이 약 930㎝, 폭 약 320㎝,이다. 강당지의 양 쪽에 는 할석을 2열로 축조한 석렬이 'ㄱ'자상으로 잔존해 있 는데, 회랑으로 추정된다. 강당지 서쪽의 석렬은 할석을 2열로 설치한 후 그 사이에 평기와를 깔았다. 동쪽 석렬 에서는 평기와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서쪽 석렬과 마찬가 지로 할석을 2열로 축조한 것으로 보았을 때 원래는 평 기와를 깔았던 것으로 추정된다.6

    내부에서는 다량의 기와편과 토기․자기편이 출토되 었다.

    3-3.築臺

    조사 당시 금당지의 동쪽과 남쪽에 일부 잔존해 있었 다. 지형에 따라 대형할석과 소형할석을 이용하여 2∼6 단까지 계단식으로 들여쌓기를 하였는데, 일부 무너지기 는 하였으나 전체적으로 양호하게 잔존해 있는 상태이다. 원지형과의 높이차이, 그리고 계단상으로 들여쌓기를 한 것으로 볼 때 동쪽과 남쪽 축대에는 계단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7

    원지형의 조건상 서쪽과 북쪽으로 갈수록 단 수가 낮 아진다. 하단에는 길이 70∼90cm 내외의 대형할석을 사 용하여 2∼3단까지 쌓았고, 그 위에는 길이 40∼50cm 내외의 보다 작은 할석들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내부에서는 다량의 기와편과 토기․자기편이 출토되 었다.

    3-4.石塔址

    동쪽과 남쪽 축대가 만나는 지점에서 확인되었다. 동 쪽과 남쪽의 축대 일부 지점에서부터 할석을 이용하여 ' ㅁ'자상으로 구획을 한 후 내부에 다량의 작은 할석들을 채워 넣었다. 금당지와의 위치라든지 내부에서 다량의 석탑부재와 주변에서 석탑 상륜부의 구조물인 앙화와 보 륜이 확인되는 것으로 볼 때 석탑지로 추정된다. 하부구 조는 따로 없이 할석을 깔아 바닥을 마련하였다. 한편 금당지의 기단석렬 부근에서 장대석 2매가 확인되었는데,

    석탑의 우주로 사용된 부재로 판단된다. 석탑지의 반대 편인 서쪽에도 원래는 석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후대 축조된 조선시대 건물지의 구들시설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판단된다.89

    내부에서는 다량의 기와편 및 석탑 부재들이 확인되 었다.

    3-5步道施設

    금당지의 출입을 위한 시설인 것으로 판단된다. 금당 지 기단 석렬의 중앙부 동쪽부분에서 직교시켜 축대까지 축조하였다. 설치된 위치로 보았을 때 금당지 기단 석렬 의 중앙부 서쪽에도 보도시설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조선시대 건물지의 구들시설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판단 된다. 보도시설의 가장자리는 40∼60㎝ 내외의 할석을 2 열로 나열한 후 그 사이에 작은 할석과 기와편을 와적 또는 수적하여 축조하였는데, 서쪽의 할석열은 유실되었 다. 이렇게 기와를 이용한 형식의 보도시설은 울주 천전 리유적, 대전 상대동유적의 고려시대 건물지, 그리고 고 려시대에 조성된 김해 덕산리사지 등에서 확인된다15).10

    4.配置形態와 造成時期

    4.1.配置形態및 性格

    경주 광명동유적의 건물지는 층위를 확인한 결과 계 곡의 중앙부에 선축된 통일신라시대 건물지가 폐기된 이 후 점토와 기와편으로 정지를 하고서 기반조성을 하였다. 건물지는 금당지, 강당지, 축대, 석탑지, 보도시설, 배수구 로 이루어졌고, 정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16). 건물지의 축조과정은 먼저 기반조성 후 축대를 축조하고 금당을 설치하였다. 금당의 뒤쪽으로 강당을 축조하고서 회랑을 설치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배수구를 호상으로 설치한 후 축대에서 금당까지 보도시설을 마련 하였다. 금당 앞의 양 쪽에는 석탑을 축조하여 쌍탑을 갖추었는데, 다른 건물지들과의 축조순서는 불분명하다.11

    금당을 중심으로 강당과 쌍탑을 배치하였는데, ‘1금 당 쌍탑식‘의 이러한 형태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가람배치로 고려시대에도 일부 이어지고 있다17).

    한편 건물지의 전체적인 규모를 봤을 때 경주의 왕경 에 위치한 대규모 사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동시기의 사찰과 동일한 가람배치로 조성되었고, 금동불입상, 귀면 와. 암․수막새, 전돌 등의 출토유물, 사찰의 가람에 있 어 가장 기본적인 금당지, 탑지 등이 확인된 것으로 봤 을 때 광명동유적의 건물지는 작은 규모의 사찰임에 틀 림이 없다고 판단된다.

    경주의 왕경도 아니고 규모도 작은 사찰이 조성된 배 경은 주변에서 발굴조사로 확인된 건물지 집단에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사찰의 입구인 남쪽 곡부를 따라 약 800m 정도 내려가면 구릉의 끝이 나오는데, 이 곳은 과거에 하천(현재의 대천-한내)이 흘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18). 대천을 건너 광명동유적의 서쪽에는 경주 왕경에서 확인된 ‘坊’이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고, 방 내부에서 대규모 도시유적이 확인되었다. 도시유적에는 대규모 건물지와 대형 건물지, 우물, 수혈, 도로유구, 석 축 제방 등 통일신라시대의 대규모 집락촌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모량부'의 일부인 것으로 판단된다. 출토된 유물들 중 평기와, 암․수막새, 인화문토기, 도질토기 등 은 광명동유적 건물지 출토유물과 동일하다. 또한 도 시유적의 북쪽 인근에는 경주시 사적 제43호인 금척리고 분군19)이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이 도시 유적에 정착하고 있었던 호족세력이나 왕족세력이 개인 적으로나 집단의 안위와 안녕을 위해 광명동유적의 사찰 을 조성하고 왕래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광명동 유적 사찰의 북쪽 구릉에는 약 50여 기의 고려시대 묘가 조성되어 있는데, 고려시대의 광명동유적 사찰은 묘들을 관리하는 기능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같은 구 릉에서는 상부가 결실된 통일신라시대의 화장묘 3기가 확인되었다. 원지형이 삭평된 것을 고려하면 통일신라시 대에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 으로 추정된다.

    4-2.造成時期및 寺名

    사지 내부에서는 다종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중 95% 이상을 점하는 것은 암키와이고, 수키와도 상당 수 출토되었다. 이외에 귀면와, 수막새, 암막새, 전돌, 석 탑부재, 인화문토기, 청자편이 다량 출토되었다.

    출토유물들 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유물은 금당지에서 출토된 금동불입상이다. 광배와 수인의 일부, 대좌, 대좌 받침은 유실되었지만 얼굴 형태나 대의, 군의, 육계 등이 아주 잘 표현되어 있을 정도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내 형을 따로 두지 않은 통주식 주조법으로 만들어졌고, 대 좌와 불신을 따로 제작하여 결합한 별주식이다. 수인은 시무외여원인이고,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불상형식을 띄고 있다. 형태상으로 볼 때 석가탑출토 금동불입상, 석 장사지 출토 금동불입상과 유사하다.1213

    또한 석탑 상륜부의 구성물인 앙화와 보륜이 출토되 었고, 특히 우주석으로 판단되는 장대석 2매는 인근지역 의 용명리 3층 석탑의 부재들과 재질이나 가공형태가 동 일하다.

    수막새는 대부분이 연화문으로 복판연화문을 이루고, 연화보상화문이 두 점 출토되었다. 단판연화문으로 장식 된 고식의 연화문수막새는 없고, 문양과 연판수로 본다 면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복판연화문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경주지역 황룡사지, 안압지 등의 출토품20)과 유 사하여 통일신라 수막새로 볼 수 있다. 또한 수막새의 일부는 주연, 자방, 연판 등이 통일신라시대 수막새보다 낮게 돌출되어 볼륨감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이는 점으로 볼 때 수막새의 시기는 통일신라시대 후기로 판단된다. 연화문수막새의 일부는 고려시대 초기의 것으로 판단되 는데, 주연부에 연주문을 넣고 중앙에는 단판 혹은 중판 의 연꽃을 배치하는 통일신라시대 연화문수막새의 전통 을 계승하면서도 문양의 세부가 생략․단순화되는 등 고 려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평기와 역시 통일신라시대로 볼 수 있는 종선문, 종 선문+X자문, 사선문, 종선문에 격자문 횡대가 있는 것 등이 시문되었고, 나말여초의 대표적 문양인 격자문, 사 격자문, 어골문이 시문된 기와도 출토되었다. 그리고 고 려 중기로 편년되는 초화문, 어골문, 종선문 및 어골문에 차륜문 횡대가 있는 것, 다중능형문의 횡대가 있는 것 등도 시문되었다.

    수량은 빈약하지만 전돌도 출토되었는데, 방형의 전 돌로 중앙에 8엽의 보상화문을 배치하고, 각 모서리에는 1/4의 보상화문을 두고서 대각선으로 서로 연결시켰다. 이러한 형태의 전돌은 8C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출토된 유물들로 볼 때 경주 광명동유적의 사 찰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축조되어 고려 중 기의 어느 시점에 폐사21)가 된 것으로 판단된다.14

    보통 사명을 밝히기 위해 사용한 구분법은 3가지로 첫째 소재지명에서의 추정, 둘째 금석문 또는 문자기와 에 의한 추정, 셋째 문헌 등에 의해서 사명을 추정 또는 확정하였다. 그 결과 사명이 확정된 경주지역의 옛 사찰 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현재까지도 별다른 이론 없이 학계에서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사명이 확정되지 않았거나 사명을 확인할 수 있는 문자기와와 같은 유물 이 현존하지 않은 일부 사지의 경우에는 다소 문제점으 로 남아있다22).

    경주 광명동유적 사지의 사명은 문헌이나 구전상으로 는 확인되는 바가 없고, 또한 표지석이나 문자기와와 같 은 사명을 알 수 있는 석물 및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현 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사지 전체가 발굴되지 않아 사찰 전체의 사역이 확인되지 않은 점 등으로 볼 때 추후 전 체 사역을 확인할 수 있는 발굴조사가 진행된다면 규명 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5.맺음말

    이상에서는 경주 광명동유적에서 발굴 조사된 통일신 라시대∼고려시대 건물지 자료를 분석하여 배치형태와 축조시기, 건물지의 성격과 인근에서 발굴 조사된 동시 기 건물지 집단과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를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경주 광명동유적의 건물지 구조는 금당지, 강당지, 축 대, 석탑지, 보도시설, 배수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금 당지는 평면형태가 ‘一字形’이고, 칸 수는 잔존한 적심과 초석으로 볼 때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판단된다. 내부 에서는 수막새, 암막새, 금동불입상, 귀면와, 전돌, 평기와 등 다종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강당지는 금당지의 뒤쪽에 위치하고, 평면 형태는 세장방형이다. 강당지의 양 쪽으로는 회랑으로 추정되는 기단 석렬이 일부 확인 된다. 축대는 금당지를 중심으로 동쪽과 남쪽에서 확인 된다. 선축된 통일신라시대 건물지가 폐기된 이후에 가 장 먼저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북고남저, 동고서저의 지형상 조건에 맞추어 대형할석과 소형할석을 이용하여 2∼6단까지 들여쌓기를 하였다. 석탑지는 금당지를 중심 으로 남동쪽에서 확인된다. 할석을 이용하여 ‘ㅁ'자형으 로 구획을 한 뒤 내부에는 할석을 채워 넣어 정지를 하 였다. 내부에서는 석탑 상륜부의 구성물인 앙화와 보륜 이 출토되었고, 금당지의 기단석렬 주변에서 석탑 기단 부의 우주로 추정되는 장대석 1매가 확인되었다. 보도시 설은 금당으로 출입하기 위한 시설로 가장자리는 할석을 2열로 나열한 후 그 사이에 작은 할석과 기와를 눕혀쌓 기 또는 세워쌓기를 하여 축조하였다.

    축조 시기는 발굴 조사된 건물지의 구조와 출토된 다 종다양한 유물들로 볼 때 나말여초에 축조되어 고려 중 기의 어느 시점까지인 것으로 판단된다. 건물지의 성격 은 규모는 작지만 통일신라시대 사찰의 가람배치와 동일 한 구조형태, 금당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출토된 금동불 입상과 귀면와, 석탑 상륜부의 구조물인 앙화와 보륜의 출토, 아주 많은 양의 평기와와 다양한 막새류, 전돌 등 의 출토로 볼 때 종교적인 기능의 사찰로 판단되고 모량 리 도시유적에서 확인된 대규모 건물지 집단의 호족이나 왕족세력이 사찰을 축조하고 왕래하였던 것으로 판단된 다. 추후 광명동유적의 나머지 구릉과 입구부인 남쪽 계 곡부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정확한 가람배치 나 사역이 밝혀질 것으로 기대하고, 또한 사명에 관련된 유물이나 석물 등이 확인되기를 기대한다.

    본고를 작성하는데 도움을 준 황창한, 최득준 선생님 께 지면을 빌려 감사드린다.

    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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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whole view of architecture rema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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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yout of the historic facil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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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loor plan of architecture rema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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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at the ruins of main building of a 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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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cavated article from the ruins of main building of a 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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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whole view of auditorium 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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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whole view of embank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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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at the ruins of stone pago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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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lics from the top of stone pagoda and Detail name of stone pago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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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whole view of pedestrian Facil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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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agram for temple arrangement with 1 main building of a temple, twin Pagod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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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ocation of the Gwangmyeong-dong site & sites around it

    Gilt-bronze Standing Buddha from the ruins of main building of a temple and Seojang-sa temple 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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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l sorts of the excavated article

    Table

    Footnote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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